연일 언론에서 보도되고 있는 일본의 대지진 사고, 독도분쟁 등을 보다가 지난해 이맘때쯤 다녀 온 대마도의 사진을 정리하다가대마도(對馬島, 쓰시마)에 남아있는 우리 역사에 관련된 장소들을 여러 종친들께 소개하고 싶어서 한 해가 지난 때늦은 여행기(?)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겨우 49.5㎞ 떨어져 있어 날씨만 맑으면 우리나라 남해안의 몇 몇 산에서도 보인다는 곳입니다. 가는 길은 항공편은 없고 배편만이 있으나 1시간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기도 합니다.
첫날은 비가 오고 있었고, 봄비라지만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의 차가운 궂은 날씨였습니다.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대마도 가장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한국전망대로 우리나라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벽돌이나 건축자재도 한국산을 사용하여 한국풍으로 지은 정자(누각)형태의 건물로 그 아래에는조선역관사순난비(朝鮮國譯官使殉難之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숙종29년(1703) 2월 5일 한천석(韓天錫)을 대표로 하는 조선역관 104명이 당시 대마도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바뀐 대마도주를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풍랑에 좌초되어 일본인 안내원 8명과 함께 112명 전원이 사망한 것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한국전망대(이곳 전망대에서 우리나라가 가장 잘 보인다고 함)
한국전망대아래의 조선역관사순난비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들고 두 번째 방문지인와타즈미신사(和多都美神社)를 향했습니다. 섬도 작았지만 그곳에 있는 신사도 작았습니다. 신사의 입구에 선토리이(鳥居, 우리의 홍살문과 같은 형태로 그 역할도 비슷함)는 정면에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바다로 몇 개의 토리이가 일직선으로 세워져 있는데 바다로 세워진 일직선의 방향이 우리나라 경주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여 과거 우리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고 합니다.
와타즈미 신사 전경
와타즈미 신사 앞 토리이(보이는 3개의 토리이 방향이 경주를 향한다고 함)
이튿날도 날씨는 궂었고 첫 방문지는 고려와 원나라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처음 발을 디딘코모다몽고군내습지(蒙古軍來襲地)였습니다. 당시 려・원연합군(麗・元聯合軍)은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게 되는데 이곳이 최초의 상륙지라고 하며, 때마침 태풍이 모래를 동반한 바람으로 불어 몽고군이 물러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바람을 일본을 구하기 위해 신이 일으킨 바람이라고 하여 신풍(神風, 카미카제)라고 하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코모다 몽고군내습지 안내판 및 포구
코모다몽고군내습지를 보고나서이시야네(石屋根)라는 돌지붕으로 된 집(창고)을 보러 갔습니다. 섬의 특성상 대마도는 바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비바람과 화재를 막기위해 이러한 돌지붕을 이었으나 이제는 이곳 한 곳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시네라는 마을에 있는 돌지붕 이시야네 안내판
시네라는 마을에 있는 이시야네(돌지붕)
시네 마을 모습
비는 종일 내리고 있었고 그 빗속에서 대마도주의 전용 선착장이었다는오후나에도선장을 보고나서아유모도시자연공원도 탐방하였습니다.
오후나에 도선장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마지막 날인 3일째는 날씨가 맑았습니다. 먼저대마도민속자료관을 찾아 그 앞에 세워진고려문(高麗門)과조선통신사비(朝鮮國通信使之碑, 1992년 세움)를 보고난 후 당시조선통신사의 숙소를 찾았습니다. 찾아간 통신사의 숙소는 절로 바뀌어 있었고, 임진왜란전 통신사로 갔던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시비(詩碑)가 그 후손들에 의해 앞마당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번창한 후손들에 의해 비는 세워지고 당대 최고의 사대부로 추앙받던 그였지만 당시 왜 정사였던 황윤길과 다른 내용을 보고하여 죄 없는 만백성을 고통에 몰아넣었는지가 궁금합니다. 일본의 야욕으로 어차피 일어날 전쟁이었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또 많은 백성들이 고생을 하였겠지만 이를 탐지하기 위해서 일본까지 간 통신사들의 올바른 보고만 있었다라면 그토록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피해는 입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깝기만 할뿐입니다.
대마도민속자료관 앞 고려문
조선통신사비(대마도민속자료관 앞)
서산선사라는 절로 바뀐 조선통신사 숙소
조선통신사 숙소 앞에 세운 학봉 김성일 선생 시비
다음 방문지도 안타까움만 더해주는 곳으로금석성(金石城)이라는 성의 유적 안에 세워진덕혜옹주(德惠翁主)와 대마도주(對馬島主) 아들의 결혼봉축기념비입니다. 비문은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李王家宗伯爵家御結婚奉祝記念碑)라고 새겨져 있어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왕가 명칭부터 격하시키고 있습니다.(제주도보다 적은 대마도의 도주와 동격으로 볼 수 있는 이왕가로 호칭) 더구나 한 나라의 공주를 자기 나라 작은 섬의 주인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고 비운의 한 평생을 살게 한 사실은 한동안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한 흔적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덕혜옹주 결혼기념비가 있는 금석성 입구
덕혜옹주 결혼기념비(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 전면
덕혜옹주 결혼기념비(이왕가종백작가어결혼봉축기념비) 후면
마지막 방문지로수선사라는 작은 절을 택하였습니다. 그 곳은 한말의 문신이며,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의병을 모아 일본에 항쟁하다가 전라도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사령부에 넘겨져 대마도로 유배되고 그 곳에서 생을 마친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의 순국비가 있는 곳입니다. 크지 않은 비의 전면에는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었고, 후면에는 1986년에 세웠다고 새겼습니다.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가 있는 수선사라는 절 정문
면암 최익현 선생 순국비(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
수선사로 가는 길 옆의 작은 카페(담장이가 눈길을 끔)
일본이라는 나라가 원래 깨끗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대마도도 작은 섬이지만 깨끗하였습니다. 그리고 찾아온 관광객에게는 친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우리 역사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그 흔적 모두를 밝은 기분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어두운 그늘을 남기고 있는 흔적들이 더 진하게 기억되고 있음은 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꼭 애국심이라는 거창한 표현을 빌리지 않았음에도 그러했습니다.